김충남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
대통령학 전문가

9.11 이후 성조기 물결로 뒤덮였던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을 통상적 정부 교체로만 인식하며 한미관계를 낙관만 해서는 안 된다. 외교안보 라인에 포진된 초강경 인사들이 계속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이후 금융위기를 계기로 ‘강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는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 네오콘(Neo-Con) 강성 보수노선이 노무현 정부의 진보노선과 충돌했지만, 트럼프 노선은 부시 당시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트럼프 노선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알 카에다의 테러 공격 이전 미국의 전형적인 거리는 공공건물에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었을 뿐이지만 9.11 직후부터 도처에 엄청난 수의 성조기가 내걸렸다. 미국이 직접 공격받으면서 미국의 안전과 자신감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면서 미국인들의 분노와 애국심이 폭발한 것이다.
9.11 한 달 후 실시된 <USA Today> 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63%의 가정에서 매일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었고, 자동차의 28%, 입고 다니는 옷의 29%에 성조기를 달고 있었다.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인 월마트(WalMart)는 9월 11일 당일에만 성조기 판매량이 11만 6천개로 폭증했고 다음 날에는 25만개에 달했다. 이 숫자는 1년 전 같은 날짜의 판매량 6,400개와
1만 개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증가세였다. 그 후 1년간 성조기 수요는 10년 전인 걸프전(theGulf War) 당시에 비해 무려 10배나 되었다.
미국의 이 같은 현상은 천안함 폭침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던 한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행사시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는 단체들이 지지 않고, 거기에는 공무원노조도 포함되어 있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알 카에다의 테러공격은 미국 전체를 순식간에 공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테러분자들이 납치한 여객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110층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여 동시에 붕괴되었고 워싱턴 교외의 국방부 청사도 크게 파괴되었으며, 백악관 또는 국회의사당 공격을 목표로 했던 비행기는 승객들의 사투 끝에 피츠버그 부근에 추락했던 것이다. 순식간의 테러공격으로 3천명 이상이 사망했고 그 중에는 구조 활동을 하던 경찰관과 소방관이 400여 명이나 되었다. 부상자도 1만여 명에 이르렀고 재산 피해도 엄청났다.
테러공격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몰라 미국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대형 건물은 대피소동이 벌어졌고 공항, 대형 쇼핑센터, 경기장 등은 텅 빈 상태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학부모들도 많았다. 9.11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젊은이들은 갖가지 불만을 토로하며 이민 갈 생각까지 했지만 테러공격 이후 자기들이 누리는 자유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국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짊어지고 다니는 가방에 성조기를 꽂고 다니다가 공군 제트기가 지나가면 성조기를 흔들고 환호하면서 스스로 애국자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언했고 관리들과 시사평론가들도 이것은 무슬림과의 대결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종교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냐 하면 9.11테러공격은 급진 무슬림단체의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빈 라덴은 서방 세계를 대상으로 ‘성전(聖戰)’을 독려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공격당한 사실에 분노하면서 애국심이 폭발했고, 그것이 성조기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성조기가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국가정체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당선되었던 것은 9.11 이후 전개되어 온 백인 중심의 애국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그 동안 많은 백인들은 이민자의 유입 등으로 미국의 정체성이 크게 약화되고 있다고 우려해왔기 때문에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다”는 트럼프의 선거 구호에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도전받고 있는 건국 당시의 미국정체성
건국 당시 미국 국민은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종교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청교도였고 그 외 가톨릭과 퀘이커, 침례교 등 기독교의 소수 교파들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성공회(Church of England)를 국교로 정한 후 국가로 하여금 국교를 보호하도록 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종교박해를 피해 종교적 이상향을 꿈꾸면 신대륙으로 왔고,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대부분 국교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유로 아메리카로 왔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독립전쟁 당시 기독교가 중심역할을 했다. 그들은 영국의 식민탄압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남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의 독립투쟁은 정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이는 자명한 진리”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미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규정했다. 당시에는 사실상 기독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란 특정 교파를 차별하거나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을 뿐이며 미국의 건국정신에 배치되는 종교의 자유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취임하는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성탄절이 되면 전국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싸였고 성탄절 전후 사람들이 만나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했다. 학교에서도 자율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처럼 미국은 청교도 중심의 건국이념에 따라 국가정체성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시대(progressive era)’를 거치면서 미국의 정체성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비(非)기독교 이민자가 많아지면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좌파 진보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즉 반전평화운동, 민권운동, 페미니즘운동을 통해 모든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같은 진보세력 중에는 마약과 술, 성적 문란, 낙태와 동성애 등 기독교 가치에 배치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아가 그들은 백인 남성 중산층과 제조업 경영진과 대주주들을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타도 투쟁을 벌였고, 극단적인 페미니즘운동은 백인 남성을 ‘타도해야 할 계급’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1981년 레이건의 집권은 미국의 도덕적 퇴락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대통령선거 유세 당시 미국을 성경에서 말하는 ‘언덕 위에 빛나는 도성(the glorious City upon the Hill)’에 비유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처럼 미국 보수주의의 뿌리는 기독교인 것이다.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진보적인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서 진보주의 노선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종교의 평등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민자들이 많은 지역의 학교에서는 성조기를 게양하지도 않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하지 않았다. 특히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성 추문으로 탄핵대상이 되면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뒤이어 집권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나친 평등주의’가 미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흑인 등 소수인종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오바마 대통령 하에서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은 종교적 문화적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크리스마스 전쟁’이 다. 크게 늘어난 무신론자와 기독교 이외 종교 신봉자들은 다른 종교의 기념일은 무시하고 성탄절만 특별 취급하는 것은 기독교의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진보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비(非)기독교인들을 고려해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 해야 하고, 공공장소에 아기 예수 탄생 관련 조형물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측과 이것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며 반발하는 측과의 갈등이 ‘크리스마스 전쟁’이 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어느 것이 진정한 미국적 생활방식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였고, 그것이 ‘문화전쟁(cultural war)’으로 확산되었다. 보수 우파세력은 ‘미국적인 생활방식’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청교도적인 것으로, 그것은 건국 초기의 보편적 생활방식이었다. 그들은 병역과 납세 의무를 다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중시했다. 이에 비해 진보 좌파 세력의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빈민, 여성, 소수 인종,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의 다양한 가치와 생활 방식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정체성 위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각성
이와 관련하여 사무엘 헌팅턴은 이라크·아프간전쟁 시작 직후 발간한 <우리는 누구인가: 미국 국가정체성에 대한 도전들(Who Are We? The Challenges to America's National Identity)>이라는 책에서 미국이 겪고 있는 사회정치적 갈등을 국가정체성 위기로 해석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이 소수 민족 중심의 정체성, 인종 정체성, 성(性)정체성 등에 의해 미국의 정체성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우려했다. 그는 로마제국도 정체성 붕괴로 패망했다면서 미국은 국가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국가정체성에서 모범적인 미국에서 그것이 문제라면 현대사에 대해 공감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국가정체성은 자못 심각하다 하겠다.
과거 미국의 이민자는 유럽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신이 다수였다. 특히 대대적으로 유입된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은 미국문화에 동화되기보다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견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문화적 동질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학교에서는 미국역사보다는 출신 국가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들의 고유한 종교적 문화적 행사를 개최하면서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예를 들면, 1998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과 멕시코 간 축구경기 당시 9만여 명의 관중 대부분이 멕시코기를 흔들며 멕시코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동시에 미국기가 등장했을 때는 야유를 보냈고 미국 선수들을 대상으로 맥주 깡통 등을 던지며 적대감을 표시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독립 당시 미국은 백인이 절대 다수였고, 그것도 대부분이 영국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청교도였기 때문에 문화적 동질성이 높았으며, 그래서 그들은 독립선언과 헌법에 기록된 원칙과 정신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러나 20세기 말의 미국은 건국 초기에 비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 동안 인구는 100배 늘어났고, 인종 구성도 백인 69%, 히스패닉 12%, 흑인 12%, 아시아인 4% 등 다인종사회가 되었으며, 종교도 개신교 63%, 가톨릭 23%, 기타 종교 8% 등 다(多)종교사회가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 하에서 미국에서는 건국 정신과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되살리자는 보수세력과 여성, 소수 인종,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다양한 가치와 생활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진보세력 간에 갈등이 커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 청교도정신으로 되돌아가지는 대각성운동(Evangelical movement)이 급성장했다. 그 동안 민주당은 소수 인종 등 진보세력을 대변해왔고 공화당은 주로 기독교도와 백인 등 보수세력을 대변해왔기 때문에 종교전쟁과 문화전쟁은 정치영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선거 유세 당시 트럼프는 크리스마스 때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해야 한다면서 기독교도들이 많은 백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것이 승리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자’는 트럼프의 구호가 미국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건국이념과 청교도전신을 되살리는 것도 의미했기 때문에 트럼프를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국가정체성을 중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대결 상황에 처해있는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국가정체성이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정체성이 위태로운 수준에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Time지> 최신호는 세계 유일 슈퍼파워인 미국이 와일드카드(Wild Card)가 됨으로써 세계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더구나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의무를 다하지 않은 동맹에 대해 모른 척 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만약 향후 한국의 정치판도 변화로 북한에 대해 유화적 정책을 택하거나 미국과 중국 간에 등거리외교를 펴는 등, 동맹국으로서 정체성이 불분명해질 경우 한미관계는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