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현재 국군방송 라디오 작가


어린이들 세계에서는 또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몸이 아픈 약자를 경기와 놀이에끼워주기 위한 ‘깍두기’라는 배려의문화가 있다. 이에 국방, 군사,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비전문가인 필자가 일종의 ‘깍두기’ 신분으로 다양한 이슈에대한 소견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피력해 보려 한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이면 선풍기는 밤새 과로에 시달린다. 가뜩이나 낡아빠진 선풍기라 ‘회전 상태’로 맞춰놓으면 머리를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몸을 뒤척이다보면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도리어 정신은 또렷해진다. 그나마 그 소리는 여름철마다 귀에익숙한 일상의 소음이라서 시간이 지나다보면마치 자장가처럼 귓가에서 아련해진다.

그 밤, 선풍기의 노고와 헌신으로 가족은 더위를 잊고 단잠에 빠진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선풍기도 ‘밤샘 근무’로 녹초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전원을 끄고, 플러그부터 뽑는다. 금방이라도 숨이끊어질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힘겹게 머리를 돌려대던 선풍기가 초저녁부터 ‘초과 근무’에 이어 ‘밤샘 근무’까지 했으니 아무리 생명체가 아닌 기계라도 그만 좀 쉬고 싶으리라.

그나마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는 날은한여름 밤의 정취라도 느낄 수 있지만, 에어컨을 틀어야 될 정도로 초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이면 단잠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다. 잠들무렵 에어컨을 ‘수면 모드’로 맞춰놓아도 한두시간이 지난 뒤에는 서늘함이 느껴져서 홑이불을 덮는다. 그러다가 또 얼마쯤 지나면 이제는 서늘한 정도가 아니라, 추위를 느껴서 에어컨 온도를 1, 2도 정도 올린다. 그러다보면 새벽녘 무렵에는 더울 때가 있고, 답답할 때도 있고, 추울 때도 있어서 또 다시 에어컨 온도를조절하려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에어컨마다 ‘인공 지능’이나 ‘쾌면 기능’까지 갖춰져 있지만, 개개인 몸에 알맞은 ‘맞춤형 에어컨’이 아니다보니 온도를 맞추는 게 꽤나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 거기다 또, 전기세까지 은근히 신경 쓰이다보니 에어컨을 틀어놓고 잠을 자는 밤에는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기야 기계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바람과 온도에 얼마나 더 큰 만족을 바랄까.

그러고 보니 내가 군 생활했던 곳에서는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없다. 강원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리라. 그곳에서 첫 여름을 날 때 견디기 어려울 만큼 더위를 탔다. 부대 주위에 고층 건물이 전혀 없어서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노출돼 더 덥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흔한 선풍기도 한 대 없는데다가 일과 시간에는 사계절용 전투복을 소매만 걷은 채 입고있었으니 더 덥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한낮의열기는 빠르게 식어버렸다. 그때 부대원들은생활관 뒤 개울에서 머리를 감거나 등목을 하면서 잠시나마 여유 있는 담소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한여름의 열기는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대야라는 말도 생소하게 들릴 만큼 한밤이 되면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게 아늑한 시간과 공간에서 부대원들은 생활관 너머 야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소리를 들으며 침상 위에 고단한 몸을 뉘었다 .

새벽에 탄약고나 상황실 초소에서 경계 근무 중일 때는 주위가 적막해서 뻐꾸기 소리가더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구슬프게 들리기도했고, 청아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가 오히려 더 짙은 적막감을 자아냈다. 밤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그 별들은 한낮에 뜨겁게 달궈진 마음 속 열기마저 식혀주었다. 경계 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왔을때, 잠결에 모포나 침낭을 차내고 자는 부대원들을 어김없이 보게 됐다. 불침번은 한여름이라는 계절을 망각한 것일까. 그는 살며시 다가가 모포나 침낭을 다시 살포시 덮어주었다.그곳에 한여름은 있어도 열대야는 없었다.

한낮에 무더위는 있어도 한밤의 열기는 없었다. 오히려 한여름 밤에는 활기가 더 넘쳤고,정겨운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초열대야로 잠못 드는 밤이면, 그때 그 한여름 밤의 정취가그리워진다. 아련한 기억을 따라 이 몸도 그날밤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