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현재 국군방송 라디오 작가

어린이들 세계에서는 또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몸이 아픈 약자를 경기와 놀이에끼워주기 위한 ‘깍두기’라는 배려의문화가 있다. 이에 국방, 군사,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 비전문가인 필자가 일종의 ‘깍두기’ 신분으로 다양한 이슈에 대한소견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피력해 보려 한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간다. 어둠은점점 길어져만 간다. 이맘때면 군에서 야간경계근무를 서던 추억이 떠오른다. 온통 어둠에 잠긴 탄약고 초소. 신병 때 그곳의 어둠은 적보다 무서운 대상이었다. 어둠속에서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밀려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내면 온몸에 바늘을 꽂은 듯 신경이 곤두서고, 피부에는 닭살이 돋곤 했다.특히, 새벽에 북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남 방송’ 소리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공포 그 자체였다.

한밤중에도 휘황찬란한 빛들로 가득한 서울에서만 생활하다가 군에 입대해서인지어둠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토록 심장이 오그라들 듯이 두렵던 어둠은 일병이되고, 상병이 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눈에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밤은 외롭고, 두려운 시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밤의 고요가 안락함으로 다가오고, 누군가는 도시의 화려한네온사인과 조명들을 보면서 생동감을 느낀다. 나 또한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는 낮보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에 몸속의 세포가활어처럼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한낮에 도시의 분주함은 오히려 무료하게보이지만, 한밤에 도시의 차분함은 오히려심장을 뛰게 만든다. 이맘때 한낮의 풍경은낙엽이 지저분하게 나뒹굴고, 나무의 가지들은 앙상하게 메말라가면서 황량함과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달빛처럼은은한 빛의 백열등이 내걸린 시장 안 과일가게의 저녁 풍경은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늑함을 자아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어묵이며 호떡을파는 소형 화물차에도 은은한 백열등 불빛이 가득할 때, 식욕보다는 정겨움에 이끌려그 불빛 안으로 들어간다. 그 불빛 안에는상인의 고단한 일상과 넉넉한 웃음이 담겨있고, 어느새 백열등 아래에서 비대해진 나의 그림자도 담겨있다.

차 소리마저 아련하게 멀어지는 깊은 밤,이제는 사색의 시간이다. 머릿속에 뒤엉킨잡념의 실타래가 풀리고, 망상과 공상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한밤중에 문득 어둠 속에 잠겨있을 초병을 떠올린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둠이 두렵지는 않을까? 귓불이 시릴 정도로 밤기운이 차가워서오들오들 떨고 있는 건 아닐까?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밤에 독일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네. 눈 붙일 수도 없이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라고 조국을 향한 심정을 노래했다. 설령 초병들이 야간 경계근무 중에 하이네처럼 조국을 생각하지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밤은 낮보다 밝고, 역동적이다.

이맘때 초소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섰던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그 시간이 얼마나 고독한 시간인지 안다. 추위와 고독 속에서 한시간은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만 느껴진다.손가락 끝마디는 추위로 무뎌져가고, 콧속에서는 맑은 콧물이 줄줄 새어나온다.

차가운 밤기운이 전투복에 스며들어서 마치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다. ‘제자리 뛰기’라도 하면서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싶지만, 작은 몸짓의 진동조차도 적막을뚫고 멀리 퍼져나가기 때문에 마음만 굴뚝같은 상황이다. 이 밤, 상념에 잠긴 초병의얼굴과 빨갛게 언 귓불과 그를 둘러싼 고독을 떠올린다. 나도 그였으리라.

깊은 밤에 시공간을 초월한다. 최전방 초소에 내가 서있다. 옆에 선 초병은 조금도흔들림 없이 북녘을 주시한다. 그의 두 눈은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고, 생기가 돈다. 그가 지금 하이네처럼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밤은 낮보다 밝고, 역동적이다. 이 깊은 밤, 어둠 속에 잠겨있을 초병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