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산
시인 / 언론인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여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나는 저 유명한‘공산당 선언’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일제 때인 1920~30년대무렵이었다.

일제 식민통치 하의 암울하던 시대에 약소민족의 해방과 무산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이 ‘선언’은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자주독립 및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간절하게 희구하던 당시 조선 지식
인들과 청년 학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1847년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집필하여 이듬해인 1848년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이로인해 빚어지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고 있다는 점에서 그 통찰력이 놀랍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소책자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했다. 일제 때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 학생들 가운데에는 ‘약소민족의 해방과평등’이라는 공산주의 사상의 매력 때문에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자 공산주의는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은 해방된 지 겨우 6개월만에,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보다 무려 2년 6개월 전인 1946년 2월 9일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해서 한반도 북쪽지역에 무산자의 천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지고 국토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지 한 세기반이 지나도록 전 세계 공산국가 중 어느나라에서도 공산당의 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 때 지식인·청년·학생들의 가슴에불을 지피고 심장의 피를 끓게 했던 ‘공산당 선언’은 사실 ‘허구’였던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세운 지 겨우 70여년만인 1991년 12월 무너지고, 공산주의라는사상은 인류역사에 끔찍한 죄악과 상처만을 남긴 채 사망해 버렸다.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주의 체제도 모두 무너졌다.

공산주의를 국가 지도이념으로 삼고 ‘노동자의 천국’을 확신하며 출범한 북한 ‘김씨 왕국’은 지금 ‘보스 1인 중심의 마피아형 군사독재체제’가 되어 ‘포로수용소’나다름없는 ‘악(惡)의 축’으로 떨어졌으며 ‘인민의 지옥’이 되고 말았다.

유엔과 미 국무부 등이 집계한 남·북한의각종 통계를 들여다보면 북한의 연간 경제소득은 남한의 40분의 1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남한이 북한보다 40배 이상 더 잘산다는 얘기다. 북한은 세계 229개국 가운데 아프리카 몇 나라와 함께 최빈국 그룹의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어쩌다가, 무얼 하느라 이 모양이 되었는가?

지난 1990년대 중반에는 북한에서 몇 해사이에 약 3백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한 그릇의 밥을 위해 살던 고향을한밤중에 탈출해야 하고, 그런 주민들을 체포해 수용소에 가둬놓고 고문하는 나라는이 지구상에 북한 말고는 없다.

북한에서 이처럼 동포들이 굶어죽어 나가고 있던 1980~90년대, 남쪽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이라는 뜬금없는 사이비종교를 떠받들고 신봉하는 종북 주사파(從北 主思派)들이 대학가를 휘젓고 설치면서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학가에 ‘주사파’라는 이른바 ‘386 종북학생운동권’의 씨를 뿌린 장본인은 서울대공법학과 82학번 김영환(金永煥)이다. 그는 1980년대 민족해방(NL)계열 운동권의핵심이었다. 김영환은 1986년 구국학생연맹을 만들고 북한 단파방송을 그대로 베낀‘김일성 주체사상’을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대학가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의 ‘강철서신’은 주체사상 전파의 교본이 되었으며, ‘강철’이라는김영환의 필명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주사파 이론의 대부이자 민족해방 운동권의 신화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는 1991년 강화도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영환은 김일성을 두 번면담, 주체사상에 관해 토론을 하고자 했으나 김일성은 자신이 창안했다는 주체사상에 관해 기초마저도 제대로 모르고 있더라고 김영환은 토로했다.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북한 학자들도 만났으나 그들 역시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 늘어놓더라는 것이다.

김영환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후 미화40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갖고 돌아와 서울 법대 동기생 하영옥 등과 함께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을 조직했으나, 그는 김일성을 만나고 온 후 주체사상과 북한 현실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갖게 됐다. 그는 번민 끝에 결국 1997년 민혁당을 해체해 버린다. 이때 해체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들이 하영옥, 이석기 등으로 이들은 민혁당을 재건한다. 김영환은 1990년대 후반 구속되었으며, 그 뒤 스스로 전향서를 쓰고사상전향을 하기에 이른다.

그 후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수많은주사파 핵심들이 자진 전향했다. 김영환은지금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북한 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북한인권을 위한 국제대회’에서 “북한은 1990년대부터 보스1인 중심의 ‘마피아형 군사독재체제’가 되었으며, 사회주의적 요소는 파괴됐고 북한은 더 이상 사회주의 사회도 아니다”라고비판하기도 했다.

한 때 주사파 이론의 대부이자 민족해방운동권에서 신화 같은 존재로 추앙받던 ‘강철서신’의 장본인 김영환이 ‘북한은 마피아형 군사독재체제’라는 것과 ‘주체사상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양심에 따라 전향한그 결단은, 아직도 물인지 술인지 구분 못하고 분별없이 날뛰는 이 땅의 지진아(遲進兒)들, 곧 종북 좌파들이 ‘벼락 맞은 듯이’ 깨우치고 거듭나는(be born again) 데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