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

분단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다. 6·25전쟁으로 수백만이 희생당했고, 휴전 이후 60여 년, 전쟁 아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김일성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북한정권을 고려할 때 통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지 예측하기 어렵다. 통일을 갈망할수록 분단의 책임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로 건국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의 권력욕 때문에 ‘단선’(단독선거), ‘단정’(단독정부)을 통해 ‘분단국가’, ‘결손(缺損)국가’, 또는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지만 역사를 넓게 보지 못하고 분단을 몇 사람의 지도자들의 책임 문제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힘없는 민족의 운명은 결코 지도자 몇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한말부터 일본, 중국, 러시아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두 차례 전쟁까지 한 후 일본이 차지했지만, 일본의 패망 후 소련이 한반도를 다시 차지하려 했던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분단의 원인인 것이다.

러시아제국의 극동진출과 대한제국
19세기 중반 러시아제국은 대영(大英)제국과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의 해양진출이었다. 강력한 영국해군이 북해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흑해의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크리미아전쟁(1853~1856)이지만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대패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진출하고자 이전쟁 직후부터 7,400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나섰으며 1897년 부분 개통됐다.
이 무렵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두 가지 ‘승리’를 거둔다. 그 하나는 청일전쟁(1894~95) 후 일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프랑스, 독일과 연합한 ‘3국 간섭’을 통해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차지했던 랴오둥(遼東)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반대급부로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항과 다롄(大連)항을 조차(租借)하여 러시아함대를 주둔시키고 하얼빈에서 다롄에 이르는 동청철도 부설권도 획득했다.

다른 한편 대한제국에서는 3국 간섭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친러정책을 폈고 그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했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1년 간 피신했다. 러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확대했다. 즉, 1896년에 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전 유역의 산림 채벌권, 울릉도 산림 채벌권, 함경북도 광산 채굴권, 한성시내 전등 및 전화 가설권 등을 획득했고, 다음 해에는 울산 앞 바다 포경권과 황해도 사금(砂金)광산 채굴권을 획득했으며, 1899년에는 마산만을 조차하여 부산과 진해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1903년에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하여 러시아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방대한 산림을 가진 러시아가 결코 압록강 유역이나 울릉도의 산림을 탐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러시아는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만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러시아에 랴오둥반도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여기다가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으로 상황이 반전된 데 대해 일본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국은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두고 갈등이 계속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한반도를 38도선 또는 39도선으로 분할하는 방안까지 논의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러일전쟁(1904~05)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패배했다. 36척으로 구성된 러시아 발트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 7개월의 항해 끝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대한해협에 도착했으나 일본함대에 기습당해 대패했다.



한반도를 쟁탈을 위한 러일전쟁
세계 패권을 노리던 러시아가 동방의 작은 섬나라에 패배한 것은 러시아 민족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가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따라서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의 북한 점령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한 직후인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패배는 러시아인들에게 쓰라린 기억을 남겼다. 그 패배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 치욕적인 ‘검은 반점’을 남겼다. 우리는 일본이 패망하여 그 검은 점이 지워질 날을 고대해왔다. 40년 동안 우리는 이 날을 기다려 왔다.”
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에 열린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3거두(巨頭)가 참석한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을 간청했다. 당시 일본군은 병력 700만, 전투기 1만 대, 군함 500여 척이었던 데 비해 태평양 지역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은 병력 180만, 전투기 5천 대에 불과했다. 미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미군의 사상자가 100만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루스벨트의 절박한 심정을 간파한 스탈린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빼앗겼던 러시아의 권리를 회복해줄 것을 요구했다. 즉 쿠릴열도와 사할린의 영유권, 만주철도 운영 참여와 다롄(大連)항과 뤼순(旅順)항에 대한 권리 등을 요구했는데 루스벨공산당 국제부 부부장이었던 코바렌코가 증언하고 있다. 코바렌코에 의하면,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북한 소비에트화의 조기 정착을 위한 지도자 선정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스탈린은 극동군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했고, 이에 따라 소련 극동군 사령부는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심사했다. 심사기록에는 다음과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록이 있다.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요.”
소련 극동군 사령부는 심사 후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했다. 추천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이란 평가가 붙어 있었다.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긴급지시를 받고 김일성은 소련군 특별수송기 편으로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던 것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김일성이 스탈린에 의해 직접 선발되었고 김일성의 집권과정에서 스탈린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면 북한정권의 수립은 소련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지 한 달 쯤 되는 무렵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군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암호지령을 발송했다. 해방된 지 불과 한 달 후에 내려진 이 지령은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보다 이틀 앞선 9월 18일 하바롭스크에 있던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 외 71명은 극동군사령관 명령에 따라 소련군함을 타고 원산항을 통해 입국했다. 그들은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라 각 지방으로 분산돼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88여단의 제1대대장이었던 김일성 대위는 평양시 부사령관, 제2대대 정치부대장 김책 대위는 함흥시 부사령관, 제2대대장 강건은 청진시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88여단 출신들을 활용해 북한지역을 조기에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뒤이어 소련은 소련에서 살고 있던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교육을 받은 각급 전문가 428명을 차출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보내 공산정권 수립의 실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소련군정은 10월 14일 평양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성을 소개했다. 바로 하루 전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비밀회의에서는 32세에 불과했던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했고 12월 17일에는 북한지역 공산당 최고지도자로 공식 발표되었다. 뒤이어 1946년 2월 발족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때부터 그는 북한의 독재자가 되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이뤄지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소련군정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김일성의 집권은 스탈린의 작품인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는 레베데프와 슈티코프 등 공산혁명 전략가들이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 북한정권 수립을 지휘하고 통제했다는 것이 그들의 회고록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