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성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
국방대 명예교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위대한 역사가이자 문명비판가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라는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유명하다. 「역사의 연구」는 원래 1933년에 3권, 1939년에 3권, 1954년에 4권이 출간되어 총 10권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1959년에 역사지도책(Atlas)이 추가되고, 1961년에 이 저술에 대한 비판에 답하는 「재고찰」(Reconsiderations)편이 첨가되어 도합 12권이 되었다. 실로 28년에 걸친 경이적인 노작이다. 이 방대하고 경이로운 저술은 소머벨(D. C. Somervell)에 의해 1946년에 1~6권의 축약본이 출간되고, 1957년에 7~10권의 축약본이 출간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명멸했던 문명들의 성쇠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발생-성장-쇠퇴-해체라는 4단계 과정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문명을 역사 연구의 단위로 설정하고, 문명들의 성쇠 원인과 유형들에 천착하여 인류 문명의 발생과 소멸을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즉, 자연이나 다른 문명, 다른 인간집단, 혹은 내부적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가의 여부가 한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해체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북반구의 4계절이 뚜렷한 지역들이 그 범주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명의 성장
일단 발생에 성공한 문명이 성장을 거듭하려면 응전을 주도할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ies)의 창조적 역량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유형·무형의 창조적 산출물을 비창조적 다수인 대중이 뒤따라 수용해야 한다. 창조적 소수가 이룩한 ‘응전의 방법론’을 대중이 뒤따라 잡아 수용하는 것을 ‘모방’ 또는 ‘학습’(mimesis) 이라고 하는데, 모방 내지 학습이야말로 문명의 습득과 정착 그리고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회적 훈련 방식이다. 창조적 소수가 아무리 빛나는 창조적 응전 방안을 만들어 내더라도 대중이 이를 모방하여 수용하지 않으면 문명의 성장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실로 모든 문명은 ‘학습의 축적물’인 셈이다.

토인비는 이러한 창조적 소수에 의한 창안과 대중에 의한 모방을 하나의 틀로 묶어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이라고 불렀으며, 한 문명의 성장은 ‘자기결정’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문명의 쇠퇴
토인비는 문명 쇠퇴의 근본적 원인을 내적인 요인에서 찾고 있다. 즉, 한 문명은 ‘자기결정’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 내지 실패는 우선 창조적 소수의 창조성의 상실과 그들에 대한 대중의 모방 철회로부터 빚어진다.
그러면 창조성의 상실은 어떻게 초래되는가? 무릇 창조성의 상실은 만족과 교만으로부터 비롯된다. 성찰과 반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적 만족 및 교만을 토인비는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이 휴브리스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자아(self)와 제도(institution)와 기술(technique)을 마치 그것들이 항구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상화’(idolization)함으로써 창조적 소수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제의식과 창조적 해결책의 창안을 방해하고, 기존의 성취에 도취시켜 안주하게 만든다. 이처럼 창조적 소수가 창안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대중은 당연히 등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돌출하게 된다. 즉, 창조성을 상실하여 대중의 모방 철회에 직면한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대안세력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대신, 기존의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의 힘에 의존하려 든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이들을 ‘지배적 소수’(dominant minorities)라고 이름 붙였다. 이 지배적 소수는 강제의 힘, 곧 무력과 폭력과 기만을 동원하여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마침내는 군국주의(militarism)로 빠져들게 된다. 토인비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대혼란기에 파시즘이나 나치즘, 그리고 공산주의 같은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 체제와 이념의 대두를 내다본 탁견이 돋보인다.
그러면 지배적 소수가 더 이상 무력·폭력 등 강제적 힘에 의해 대중을 지배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토인비는 여기까지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바로 ‘대중영합주의’(populism)의 등장이다. 강제의 힘이 아니라 간교한 꾀로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하여 대중의 ‘눈이 먼 욕심’을 부추김으로써 인기를 끌고, 그러한 술책으로 지배권을 지탱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명 성장의 견인차가 될 새로운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를 대체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따라서 효과적 응전을 위한 ‘창안’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자기결정’ 능력이 이렇게 내부로부터 무너진 한 문명은 결국 쇠퇴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보 포퓰리즘과‘위협불감증’
국가안보는 기본적으로 ‘위협’을 다루는 실천적 체계이다. 이 위협들 가운데 안보 포퓰리즘은 가장 치명적인 내부적 위협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안보 포퓰리즘은 국가생명체의 목숨을 다루는 사안들을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왜곡시킴은 물론, 그로 말미암아 국민 전반에 잘못된 인식과 정보를 각인시켜 결과적으로 ‘안보불감증’

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안보불감증’은 곧 ‘위협불감증’이다. 국가안보를 해치는 위협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성의 위협이 ‘위협불감증’이다. 위협을 위협으로 느끼지 못하면 아예 그에 대한 대처 자체를 염두에 두지도 않게 되기 때문이다.
안보 포퓰리즘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들은 대중 영합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 내지 주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그러한 행위는 그가 봉사해야 할 국가의 울타리를 위태롭게 만들어 국가와 국민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따라서 안보 포퓰리즘이야말로 망국적이며 반역적 안보위협이다.

6가지 과잉현상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안보 포퓰리즘의 근원적 배경으로서 여러 가지의 ‘과잉현상’들이 도사리고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과잉현상들에는 민주과잉, 자유과잉, 평등과잉, 평화과잉, 민족과잉, 통일과잉 등이 있다. 물론 민주·자유·평등·평화·민족·통일 등은 숭고한 가치와 의미를 가득 품은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넘치고 지나치면 모자람만도 못할 것이다. 이제 이것들의 ‘과잉’이 어떻게, 왜 문제인지를 살펴보겠다.
첫째, 민주과잉이다.

민주주의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자유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등 3가지를 들 수 있다. 이 3가지가 모두 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이름을 띠고 있지만, 그 접두어로 인하여 전혀 다른 의미와 체제를 대변한다. 그 각각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은 ‘자유’(liberty, freedom)로서, 자유의 존재 여부가 관건이 된다. 자유가 보장되고 신장되는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이다.
민중민주주의의 기준은 ‘재산’이다. 스티브 잡스나 이건희처럼 재산이 많은 ‘가진 자’(the have)들은 민중이 아니다. 재산이 없거나 미미한 소유자들, 즉 ‘못가진 자’(the have-not)들이 민중이다. 민중민주주의는 그래서 못가진 자들, 즉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인민민주주의의 기준은 ‘사상(이념)’이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과 이념을 신봉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한다. 그 사상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반동’으로 불린다. 그래서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된 “인민들에 의한, 인민들을 위한” 민주주의이다. 민중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의 ‘4촌’ 쯤 되는 것으로서, 결국은 인민민주주의로 이행되어 가는 ‘징검다리’가 될 뿐이다. 결국 민중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름에 ‘민주주의’라는 호칭만 달고 있을 뿐, ‘민주주의’가 절대 아니다.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민’과 ‘국민’을 혼동하여, 인민이 국민의 다른 이름이라고 혼동한다. 그러나 국민의 기준은 ‘국적’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미국 국적을 지닌 자는 ‘미국 국민’이다. 국민은 따라서인민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다른 종류, 다른 이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분이 없이, 그저 ‘민주’이면 모두 같거나 좋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리하여 ‘민주’가 어지럽게 난무하고 지나치게 넘쳐서, 자유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민중민주주의는 물론 인민민주주의마저 ‘민주’의 탈을 쓰고 활개를 친다.

둘째, 자유과잉이다.
자유는 분명히 존엄한 인권적 가치이지만,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는 아니다. 자유에는 엄격한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는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데까지가 그 한계이다. 왜냐하면 내가 남의 자유를 해치는 자유를 누리려 한다면 남도 내 자유를 해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할 터이고, 그리되면 자유 자체가 존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차도를 점거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치안당국에서도 너무나 가볍게 그러한 시위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곤 한다. 그 시위꾼들이 심지어 차도에 좌판을 깔고 술판을 벌이거나 라면을 끓여 먹어도 제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쇠고기 촛불파동 당시 광화문 주변 주민들이 100일 이상 승용차를 사용하지 못할 만큼 차도를 강점할 수 있는 자유가 그 시위꾼들에게만 부여된 특권인가? 주민들이 차도로 차를 몰고 나올 수 있는 자유는 어째서 제약되어야만 했나? 필자는 일본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움과 부러움을 금치 못한 바 있다. 시위대는 깃발과 피켓들을 들고 인도로만 질서정연하게 행진했으며,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 색일 때는 멈춰 서서 신호등이 바뀐 뒤에야 길을 건넜다. 볼썽사납게 경찰차로 차벽을 칠 일은 아예 없어보였다. 한국과 일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그 누구에게도 공동체의 법질서를 훼손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남의 통행의 자유를 멋대로 해칠 자유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자체에서 합의된 체제나 이념에 대한 도전의 자유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무한대의 자유’는 곧 ‘자유의 부재’임을 깊이 깨우쳐야 한다.
셋째, 평등과잉이다.
평등 개념은 민주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체제에서의 평등은 소위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반면에,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결과의 평등’을 강요한다. 물론 모든 인간은 인권의 차원에서 평등하며, 신(神)과 법 앞에서도 평등하다. 평등해야만 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르게 생겼고, 소질과 능력의 범주나 정도, 인성과 인품, 그리고 노력의 정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기회의 평등’ 역시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평등일 수는 없다. 태어나는 환경과 그 후의 성장 및 생활환경에서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소위 ‘금 수저,’ ‘흙 수저’ 논란이 그것이다. 이 문제에서 지나치게 기계적 평등에 천착하게 되면, 그에 대한 반발로 자칫 사회주의식 ‘결과의 평등’ 개념에 경도되는 우(愚)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의 사회계층 (class stratification)이 과거 봉건사회에서의 계급적신분 차이와 같지는 않다.

우리가 평등 문제를 논할 때에, “불평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명확할 수도 있다. 사회학자 다렌도르프(Ralph G.Dahrendorf)가 갈파한 바와 같이, “같은 것을 다르게 취급하는 불평등” 보다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불평등”(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식 평등’)이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다. 결국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불평등”(사실은 이것이정당한 자유민주주의식 평등)조차 부정하는 ‘평등과잉’ 현상으로 인하여 사회주의식 ‘결과의 평등’ 개념마저 정당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넷째, 평화과잉이다.
평화는 인류 모두가 갈망하는 이상(理想)이다.

평화를 ‘이상’이라고 규정한 이유는 인간사회에서 전쟁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학술 분야에서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의 저자인 윌 듀런트(Will Durant)는 그의 마지막 저서 「역사 속의영웅들」(Heroes of History)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싸움질하는 동물”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했다. 사실 ‘절대평화’란 없다. 평화를 ‘질(質)’로평가해보자면, “얼마만큼 더 평화스러운가?” 하는 정도의 차이로 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 전쟁의 역사를 보면, 전쟁은 회피하려고하면 오히려 쫓아오고, 반대로 전쟁을 각오하고과감히 맞설 때 회피해가는 속성을 드러냈다. 위기의 시기일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어떠한 평화협정이나 불가침조약도 궁극적으로 평화를 지켜내지는 못했다. 평화는 오직 그것을 지킬 만한힘과 각오가 없이는 한 시도 지켜질 수 없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7년 10월, 제2차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하여 나라 전체가 온통 평화바람으로 요동쳤다. 6·25전쟁의 종전 선언과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가 하면, 당사자가모호한 평화체제의 도입을 외치는 등 그저 뜨거운 평화 열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평화가 과연 선언만으로 달성되는 것인가? 오히려 평화에 대한 지나친 환상, 즉 평화과잉에 얽매이다보면 유화주의(appeasement policy)에 빠지기십상이고, 이는 결국 침략자로 하여금 오판을불러 일으켜 침략을 저지르게 만든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초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 9월까지의 유럽역사를 되돌아보면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참화에 가위눌려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 및 국민들은 평화를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 다루듯 유화주의에 빠져서 양보에 양보를 거듭한 바람에, 결국은 히틀러에 의한 세계대전에 다시금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섯째, 민족과잉이다.

지금 우리가 민족과잉 현상 때문에 겪는 안보상의 가장 큰 폐해는 소위 ‘민족 공조’라는 이름의 ‘트로이 목마’이다. 북한은 고도한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우리의 민족과잉 정서를 교묘히 자극하는 민족공조를 앞세워 한미동맹에 쐐기를 박고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민족공조는 또한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을 불식시킴으로써, 대북 ‘안보불감증’을 부추기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사실 민족공조란 신기루와 같은 허구의 개념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민족공조가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상 상이한 이념과 대결적 체제를 가진 분단 민족 사이에 공조란 없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인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결과로 귀착되었는지를 여기서 새삼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것이다. 상이한 이념과 체제를 지니고 생사존망의 극한대립에 처해 있는 남북 사이에는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의 싸움만이 현실일 뿐, 민족공조는 상대를 속여 넘기기 위한 한낱 술수에 지나지않는다. 하물며 북한은 이미 스스로를 ‘김일성 민족’이라고 일컫는 마당에 민족공조의 허구성을논의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짓일 따름이다.

여섯째, 통일과잉이다.

통일은 분명히 민족의 최대 이익이자 최대 목표이고, 우리 시대에 반드시 성취해야 할 지엄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절대가치는 결코 아니다. 절대가치는 진정한 자유와 인권, 생존의 기본권 보장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위한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체제의 확립과 안보의 담보 그 자체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진리이다.

그러나 통일지상주의 또는 환상적 통일론에빠져 ‘통일과잉’의 함정에 빠질 때, 자칫하면 우리는 공산통일 또는 중립화 통일도 가능하고 괜찮다는 오류로 비약할 수 있다. 그리되면 우리가추구해야 할 절대가치,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깨지고 말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한 어떠한 착오도 절대 금물이다.

맺음말
우리는 지금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사회를 가치혼돈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사회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하다. 가족의 가치를 포함한 범인륜적(凡人倫的) 가치의 혼란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진리도 변할 수 있다”는 세상이다.

우리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가치혼돈 가운데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과잉’ 아니면 ‘결핍’ 현상이다. 너무 넘치거나 아니면 턱없이 모자라서, 도대체 중간 또는 중용(golden means)이 없다. 안정된 선진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중간이 두텁고, 소위 중간층이 사회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그러나 우리는 노사문제, 이념문제, 부(富)를 포함한 사회 공공재(公共財) 전반에걸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일로를 걷고 있다.

그중에서도 민주, 자유, 평등, 평화, 민족, 통일등 숭고한 가치들의 ‘과잉현상’으로 오히려 그가치들이 혼돈에 휩싸이고,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이러한 폐단들이 ‘안보 포퓰리즘’의 근원적 배경으로 작용하여 ‘안보불감증’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이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게을리 해서는안 될 것이다.